새로운 계시: 1937-1950

D. 워치만니와의 교통의 재개: 1946

상해 가까이에 있음으로써 위트니스리는 육 년 간 떨어져 있던 워치만니를 만날 기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위트니스리가 북부에 있을 때 그는 내륙 서부쪽에 있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들은 편지 왕래를 하지 못했으므로, 위트니스리는 치푸에서의 그의 실행이 옳은지에 대해 약간 염려가 됐습니다. 또한 이 때 왕포진 자매와 위트니스리는 워치만니의 사역을 회복시키는 일을 관심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 두 사람은 모든 기회를 붙잡아 그와 교통을 가졌습니다. 많은 때에 그들은 생명과 그 영과 일과 교회들과 주님의 회복 안의 움직임에 대해 교통했습니다. 이 모든 문제에서 워치만니는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교통에서, 위트니스리는 그들이 떨어져 있던 기간에 위트니스리가 실행했던 모든 것들을 워치만니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의 반응은, 다른 교회들에서도 같은 일을 실행하도록 위트니스리를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워치만니에게 상해 교회의 회복과 새로운 지역에 넓은 문이 열린 것으로 인해 긴급히 그의 사역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밝혔습니다. 위트니스리는 그에게 사역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위트니스리에게 어떤 거역적인 형제들로 인해 그의 사역하는 영이 그에게 상해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앟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위트니스리는 그의 사역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들 가운데 한 차례의 부흥이 긴급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 워치만니는 겉사람의 파쇄를 강조함

워치만니는 왕포진 자매와 위트니스리에게 완전히 열려 있었고 또한 주님의 사역에 관하여 그들을 지도해주었습니다. 그들과 교통을 나눌 때, 그는 거듭 거듭 겉사람은 파쇄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공개적인 사역이나 개인적인 접촉에서 그들의 영이 성령과 더불어 해방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위트니스리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1. 상해의 부흥

  그는 거듭 거듭 겉사람은 파쇄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공개적인 사역이나 개인적인 접촉에서 그들의 영이 성령과 더불어 해방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위트니스리가 상해에 머문지 얼마 안 되어서 성도들 가운데 부흥이 있기 시작했습니다. 집회 인수가 대대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942년의 대풍랑은 상해 교회로 문을 닫게 했지만, 이때 그 풍랑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회복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신속히 전국 교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복건성과 광동성에 있는 교회들은 왕포진 자매와 위트니스리가 그들을 방문해 주기를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전국의 동역자들과 인도자들도 다 상해로 와 교통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948년 4월에 전국의 갈망 있는 모든이를 초청해서 주의 회복에 관하여 교통하는 특별집회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1947년 12월 말, 왕포진 자매와 리라헬 자매와 위트니스리는 처음으로 홍콩교회를 방문하였고, 거기서 그들은 광동, 샤토우, 하문과 워치만니의 고향인 복주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이 복주 교회에 삼주 간 머무는 동안 한 차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남부로 돌아오기 전에 위트니스리는 “중국 복음 성가”를 편집했습니다. 위트니스리가 복주에 머무는 동안 워치만니는 그 원고를 한 번 살펴보았고 그 중 많은 복음 성가를 수정했는데, 특히 “사람마다 주 예수 필요해”(찬송 723장)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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