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움직이심 안에서의 동역: 1934-1936

D. 워치만니: 고난을 통해 사역함

항주 특별 집회 기간 동안, 워치만니의 모친과 가장 연장한 동역자 자매인 이연여 자매는 워치만니에게 그 집회 기간에 결혼하라고 독촉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전국의 모든 동역자들이 모였기 때문에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워치만니는 그 결혼식에서 위트니스리가 그의 들러리가 되고 란페이리 형제가 사회를 맡는 조건으로 그 결혼에 동의했습니다. 이연여 자매는 그 두사람에게 이 일에 대해서 교통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녀에게 기꺼이 워치만니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말하고 그가 그들에게 부탁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식에서 장의륜 형제의 아내가 신부 들러리를 섰습니다. 모든 동역자들과 그 지방의 성도들이 그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위트니스리는 치푸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습니다. 치푸에 있을 때 워치만니의 결혼을 반대하는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위트니스리는 신랑의 들러리였고 란페이리는 그 결혼의 사회를 맡았기 때문에, 그들 두 사람은 그러한 상황을 책임지고 처리하기에 가장 적격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란페이리는 위트니스리에게 전보를 보내여 상해로 와서 그 상황을 돌보도록 요청했습니다. 위트니스리는 즉시 신명기 23장 5절 말씀으로 워치만니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1935년 일월 일일에 위트니스리는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란페이리와 위트니스리와 왕포진 자매의 도움으로 풍파는 어느 정도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는 듯했습니다. 결국 란페이리는 질병과 피곤으로 인해 휴식을 취하려고 항주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위트니스리만이 그 어려운 상황에 남겨졌습니다.

그 시련의 기간 중, 어느 날 아침 워치만니는 그 날 신문을 가지고 위트니스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일생 중에 어떤 사람의 결혼이 전국적인 큰 신문을 통해 대문자로 공개적으로 공격받은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매우 괴로운 표정으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후에 그는 상해를 떠나 중국 서남쪽 각 성으로 여행을 했습니다.

  내 일생 중에 어떤 사람의 결혼이 전국적인 큰 신문을 통해 대문자로 공개적으로 공격받은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시에 이연여 자매 또한 상해를 떠나 중국 내륙을 방문했습니다. 위트니스리의 유일한 도움은 왕포진 자매로부터 왔습니다. 그 당시 상황은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주님의 긍휼로 왕포진 자매와 위트니스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적극적으로 계속 집회를 가졌습니다. 결국 그분이 승리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통과하게 하셨음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워치만니는 상해를 떠나기 전에 그곳의 사역에 대해 위트니스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한 장로로부터 워치만니가 상해에서의 사역의 책임을 위트니스리에게 위탁하도록 그들에게 지시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사 개월 후 워치만니는 다시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1935년 5월 무렵, 풍랑은 여전히 있었지만 어느 정도 가라 앉았었습니다. 그때 이연여 자매는 위트니스리에게, 워치만니가 사역하기를 원치 않으므로 그들은 그가 사역하도록 어떤 길을 찾아 보아야 한다고 제의해 왔습니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간청해도 그는 사역하기를 원치 않았었습니다. 어느 날 이연여자매는 위트니스리에게, “우리 함께 가서 그에게 아가서를 공부하자고 부탁해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그들이 참으로 아가서 알기를 사모하니 그들과 함께 항주 서호에 가서 두 주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아가서를 공부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주 기뻐하며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네 형자와 세 자매(다 동역자임)가 그와 함께 가서 그곳에서 묵었습니다. 그 때 그곳에서 사경한 내용이 오늘날 “노래 중의 노래”라는 제목을 출판되었습니다. 그때의 사경을 통해 위트니스리는 생명의 노정과 생명의 전환에 있어서 또 한 번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워치만니는 다시 정상적으로 사역하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부터, 워치만니가 영국의 형제회를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형제회에서는 그들이 교통을 갖고자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여러 번 그들에게 보내 왔습니다. 워치만니의 결혼 당시 그들에게는 답신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마치고 풍파도 잠잠해졌기 때문에, 워치만니는 형제회가 그들과 교통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합당하게 회신할 것인지를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위트니스리에게 이 일을 하도록 부탁했지만 위트니스리는 그의 말을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워치만니가 친히 답신을 했고, 위트니스리와 다른 동역자와 상해의 세 장로들에게 그와 함께 편지에 서명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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