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1934년 항주 집회 기간에 워치만 니가 혼인했습니다. 어머니와 맏누이 격인 동역자 루스 리 자매를 비롯해 동역자들과 그 지방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위트니스 리가 신랑 들러리를 섰고, 필립 루안이 사회를, 사무엘 창 부인이 신부 들러리를 맡았습니다.
공개적인 반대
혼인 뒤 1935년 초, 상해에서 이 혼인을 겨냥한 공격이 신문 광고로 나왔습니다. 그 나라의 주요 신문에 큰 글자로 실린 것이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평생 혼인이 이런 식으로 공개 지면에서 공격받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워치만 니는 상해를 떠나 서남쪽 성들로 갔습니다.
맡겨진 일
1935년 전반, 워치만 니는 말로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그 일을 위트니스 리에게 맡겼습니다. 왕 피스 자매가 그를 도왔고, 루스 리 자매는 중부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택한 길은 논란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투는 대신 집회를 계속 이어 갔습니다.
서호에서의 회복
1935년 5월, 항주 서호에서 워치만 니는 네 형제와 세 자매 동역자와 함께 아가서를 공부했습니다. 그 내용은 뒤에 책으로 나왔습니다. 이 일을 지나며 그는 정규 사역으로 돌아왔습니다.
혼인을 둘러싼 소란이 가라앉은 뒤, 그는 1933년 영국에서 만났던 형제회 사람들이 보내온 편지에 답했습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와 또 한 사람의 동역자, 그리고 상해 교회의 장로 셋이 함께 이름을 걸었습니다.
이 쪽은 www.witness-lee-watchman-nee.org — Watchman Nee: Ministering through Suffering 의 내용을 한국어로 정리한 것입니다. © Living Stream Ministry.